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생애 (문단 편집) === 수감, 재판과 처형 과정 === 체포된 이후에도 차우셰스쿠 부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다비자 대위는 '그녀(엘레나)가 미친 사람' 같았다고 증언했다.] 군대의 총사령관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거나, [[병영식|장교들이 먹는 급식]]을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며 [[편식|입에도 대지 않고]] 그 지방의 [[특산품]]인 고급 [[빵]]과 [[사과]], 가미되지 않은 차를 줄기차게 요구해서 매 끼니마다 끝끝내 그것들만 받아내 먹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는 건강 때문에 [[소금]]기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 신경을 써 주지 않는다고 항의했고, [[설탕]]이 든 음식을 주면 각하는 [[당뇨병]]이 있는데 왜 이런 걸 주냐고 아내 엘레나는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 놓았다. 또한 [[목욕탕]] 가는 것조차 거부해서 수감실로 [[욕조]]를 갖다 주기도 했다. 게다가 차우셰스쿠는 감금 후에도 갈색 빵을 들고 '이런 것은 먹을 수 없다'고 하자 한 대위가 '우리 병사들은 이 음식을 오랫동안 먹어 왔다'고 대꾸했으며, 소시지와 소금기가 배어 있는 치즈를 보고는 "'''이 지역은 루마니아에서도 빵이 제일 맛있는 곳인데 나에게 이런 형편없는 음식을 주다니!'''"하고 소리를 질렀다. 엘레나도 이에 맞장구치듯 각하께서 소금기 있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냐고 소리쳤다. 게다가 엘레나는 음식, 방, 침대, 깨끗한 옷이 없다며 [[진상|"'''이렇게는 살 수 없다. 집에서는 충분한 음식이 있지 않았냐?'''"고 말하며 심한 욕을 퍼붓기까지 했고,]] 이런 분위기가 3일간 지속되었다. 덤으로 차우셰스쿠는 자기를 반대하는 시위 소리를 들을 때마다 '창문을 열어라, 내가 군중에게 직접 말하겠다'라며 자기가 아직도 최고 권력자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 외에도 당시 차우셰스쿠를 관리하던 세쿠 소령의 증언에 따르면 차우셰스쿠 부부는 [[금슬]]은 좋았는지 갇힌 상황에서도 둘이 부둥켜 안고 잠을 잤다고 한다.[* 심지어 엘레나는 "날 죽여도 (니콜라에랑) 같이 죽여라, 우린 같이 죽을 권리가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함께 죽긴 했다.] 거기에 자신이 여전히 군중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자신을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게 해달라거나, 자고 있던 자신을 깨워서 텔레비전 방송국에 자신을 데려다 주면 100만 또는 200만 [[미국 달러|달러]]의 돈을 줄 수 있으며, 달러를 주기 전에 가까운 마을 보이네슈티에 감춰둔 수백만 [[루마니아 레우|레이]]의 돈을 준다고도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쿠 소령이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가난하게 산다는 사실에 다소 충격을 금치 못하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세쿠 소령은 그토록 태양처럼 받들라고 교육받은 차우셰스쿠의 진짜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구라|훗날 사람들이 이 마을을 샅샅이 뒤졌으나 돈은 발견되지 않았다.]] 혁명정부는 차우셰스쿠 부부가 체포되기 전부터 그들의 재판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보통 국민에게 하는 것처럼 일반적인 형사재판을 열어 형법으로 처벌하자고 주장하였지만 루마니아 군부에서 "차우셰스쿠가 항소하여 살아있으면 추종자들이 역으로 혁명을 일으켜 큰 [[내전]]으로 번질 것이다. 결국 외국 군대가 루마니아에 들어올 것이고, 만약 우리가 패하면 역시 차우셰스쿠와 똑같이 처벌받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군사재판을 열기로 하였다. 판결도 내부적으로는 차우셰스쿠가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완전히 미쳤다]]는 증거 등이 나오지 않은 이상 [[유죄추정의 원칙|무조건 사형에 처하기로 결론 내려진 상황]]에서 그들의 신병만 확보되면 바로 속결하기로 하였다. 그외에도 당시 차우셰스쿠를 지지하는 친위 세력을 두려워해 일찍 처형했다는 의견도 있다. 세쿠리타테 같은 차우셰스쿠파와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고, 당시 혁명세력은 숨어있는 차우셰스쿠파의 저격이나 테러로 크게 고생했다. 차우셰스쿠의 처형 직후까지도 보안군의 지하요새는 건재했으며, 이들을 진압하는 동안에도 많은 사상자가 속출했다. 차우셰스쿠 재판을 위해 가던 사람이 총을 맞기도 했다. [[http://libertyherald.co.kr/article/view.php?&ss%5Bfc%5D=2&bbs_id=libertyherald_news&doc_num=4707|이 페이지]] 참고. 그의 몰락 과정이 꽤 자세히 나와있다. 차우셰스쿠 이후 집권한 이온 일리에스쿠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일리에스쿠 정권이 차우셰스쿠 일가만 빠진 차우셰스쿠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차우셰스쿠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옛 공산당 정권 고위직들은 차우셰스쿠를 향한 부정적 여론이 술렁이는 틈을 보이자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 정권을 장악했고, [[1990년]] 루마니아 민주화 후 첫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에서도 야당이 지리멸렬한 틈을 타 압승을 거두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차우셰스쿠 정권이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한 당시의 루마니아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최대한 빨리 차우셰스쿠만 제거하여 문제를 봉합하려 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참고할 것.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9/1829657_19354.html|MBC뉴스데스크 방영 재판장면(3분)]] [[198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한 작은 [[초등학교]]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한 비밀재판이 열렸는데 이 재판에서 [[검사(법조인)|검사]]가 사형을 구형하면서 한 말이 무려 "나는 개인적으로 사형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이놈은 인간이 아니므로 상관없다."'''였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변호사까지 검사로 돌변했다고 한다. 농담이 아니라, 이 검사는 본래 변호인으로 선임된 사람이었는데 스스로 사임하고 검사가 되어 차우셰스쿠를 규탄했다! 그래서 새 [[국선변호인]]을 붙여줬다고. 하지만 그렇게 차우셰스쿠에게 붙여진 변호사 카를로도 이렇게 말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니콜라에_차우셰스쿠#.EC.82.AC.ED.98.95|당신 편을 들어줘야 하는 처지지만, 당신이 이 나라에 해 놓은 짓을 보시오. 편을 들어준다고 해결될 문제요? 당신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오. 상식적으로 누가 봐도, 아무리 당신에게 유리하게 설명해도, 당신이 이 나라 루마니아를 멸망으로 몰고 간 것을 부인할 수가 없소. 내가 변호사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담당했지만, 당신 같은 최악의 경우는 처음이오. 나도 당신을 포기했소]].''' 최후까지 의뢰인의 권리와 구명을 위해 애쓰는 것이 의무인 변호사가 법정에서 대놓고 감정적인 의견을 쏟아낼 정도로 차우셰스쿠는 그야말로 '''루마니아 전 인민의 적'''이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저 말을 듣고도 그 직후 '''자신은 루마니아의 국민을 위해 사력을 다했으며''' 누구도 자신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변호와 항소를 거부했다. 만약 항소하였다면 당시 형법상 최소 열흘 정도는 더 살아있을 수 있었겠지만, 항소는 법정을 인정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항소조차 거부했다. 물론 항소하겠다고 했어도 당시 상황상 인정되었을지는 미지수지만 중요한 것은 차우셰스쿠는 그걸 아예 시도조차 해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변호는 해야 하니 변호사가 마지막으로 사형만은 면하게 하려고 제안한 게 차우셰스쿠가 '정신 이상'이 있어서 그랬다고 주장하자는 것이었다. 정신병이 인정되면 아무리 재판을 엉성하게 해도 사형만큼은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공산권에서조차 정신 이상은 의무적인 감형 사유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우셰스쿠는 이것마저 거부하여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런 엉성한 재판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은데, 차우셰스쿠를 옹호해서가 아니라 '공개적이고 명확한 재판으로 그의 악행을 두고두고 씹을 수 있게 정식 재판을 거쳐서 전세계에 그의 악행을 알린 후 사형에 집행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스라엘]]을 보더라도 전후 나치 전범들을 쫓을 때 [[모사드]]를 보내 즉시사살을 하지않고 굳이 위험을 감수하여 이스라엘까지 비밀리에 끌고 와서 재판을 받게 하였다. 다만 차우셰스쿠는 충성하는 보안군이 아직도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빨리 처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탓이 컸다. 이는 단순한 용의자의 재판이 아닌, 분쟁상황에서 적대세력의 간부를 제거하려던 것과도 비슷하다.] 재판 직후 줄로 묶어서 끌고 나가는 과정에서도 차우셰스쿠 부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추태를 보였다. 차우셰스쿠는 "무엄하다! 감히 날 줄로 묶으려 들다니!"라며 상황파악을 아직도 못했고 엘레나는 [[어딜 만져|몸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며]] 난리를 피웠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권리 운운하며 포박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으나 끝내 꽁꽁 묶이고 말았다. 끝내 결박된 차우셰스쿠 부부는 흥분해서 병사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라며 호통을 쳐댔다. 이때 엘레나가 한 말이 "난 너희들을 어머니로서 대해왔다!"였다. 그러다 결국 죽는다는 공포에 겨워 하소연했으나 병사 중 하나가 싸늘하게 "당신들을 도와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소."라고 일갈했고, 엘레나는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을 죽이려 하다니!''라고 울부짖으며 끌려나갔다. [[https://www.youtube.com/watch?v=QhK7Gk68y24|차우셰스쿠 부부가 형장으로 끌려가던 상황을 재현한 영상]] 거기에 차우셰스쿠는 더해서 자신을 잡으러 온 혁명군들이 "인민의 이름으로 당신을 체포하겠소!"라고 외치자 그 말을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이유가 "내가 인민의 아버지인데 너희들이 무슨 자격으로 인민 운운한다는 거냐?"였다나. 사실 항소, [[심신장애]] 주장, '''진작에 하야하기''', [[하야]]하기 싫다면 '''진작에 긴축정책 철폐하기''' 등 그가 (다른 건 다 잃더라도) 목숨만은 건져서 천수를 누릴 방법은 많았다. 그러나 죄다 제발로 걷어 차 버렸고, 그 결과는 [[인과응보|참혹한 죽음이었다.]] {{{#!folding [사형 장면 (펼치기 · 접기)] [[파일:external/1.bp.blogspot.com/The%2Bexecution.jpg]]}}} 오후 4시 사형판결 1시간 반만에 차우셰스쿠 부부는 건물에서 끌려나와 담벼락에 세워져 [[총살형]]에 처해진다. 이후 총살형을 집행할 육군 제64[[공수부대|공수]] [[연대(군대)|연대]]에서는 기존의 사형 집행 방법에 따라 부사관급 이상 소총수 열 명에 실탄 다섯 발을 준비하여 사형을 집행하려 했다. 탈출할 때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었는데 한국과 미국을 제외한 서양에서 사형수에게는 사복을, 군인에게는 군복을 그대로 입히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미결수라고 보기 때문으로 죄수복은 사형수가 아닌 무기수부터 입는다. 중국에선 사형수는 형복을 입는 게 원칙이고, 현역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군인은 사형 집행 시 무조건 원래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는 것이 원칙이다.] 총살형은 보통 한국이나 미국, 중국을 제외하고 일반 징집병이 집행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기 때문에 군사경찰대 부사관급 이상이 총살형 집행을 맡으며, 그마저도 실탄은 일부에게만 지급한다. 루마니아군도 원칙대로 총살형을 집행하기 위해 지원자를 뽑았는데, 이때 군인들이 '''서로 자기 손으로 독재자를 처단하겠다면서''' 지원자가 속출했다. 그중 8명을 차출했고, 그들 전원이 차우셰스쿠를 죽이길 원하자 최종적으로 장교인 [[대위]] 1명과 [[원사(계급)|원사]] 계급의 군인 2명만이 집행에 나섰다.[* 장교는 어지간해서는 총살형에서 사격수 일을 하지 않는다. 보통 군의관이 사형수의 사망을 확인하고 사망 선고를 내리거나 군종장교가 사형수의 고해성사를 맡는 등 병과에 따라 보조적인 임무를 행한다. 유일하게 사격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장교는 사형수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을 때 확인 사살을 하도록 되어있는 군사경찰대 장교밖에 없다.] 병사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대위 이오넬 보에루(Ionel Boeru)[* 집행 이후 대위에서 중령까지 진급하였고 2002년 제대하였다. 그와는 별개로 처형 이후 차우셰스쿠 부부의 추종자에 의한 보복을 상당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 원사 제오르긴 옥타비안(Georghin Octavian) * 원사 도린마리안 크를란(Dorin-Marian Cîrlan)[* 제대 이후 수도 부큐레슈티에서 관광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https://www.google.com/url?sa=t&source=web&rct=j&url=https://www.bbc.com/news/business-31356079.amp&ved=2ahUKEwiWr8ffj93_AhVa-WEKHRIzBe8QFnoECBwQAQ&usg=AOvVaw3ECjtAqyMprPdz07aJ5tOG|#]] ] 부대 측은 이들에게 규정대로 부부당 5발씩 총 10발만 지급하려 했지만 총살형 집행인들은 니콜라에와 엘레나에게 [[탄창]] 하나씩 갈겨 버리기로 약속하고 부대도 집행인 3사람이 '''탄창 6개, 총알 180발'''을 준비한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게다가 총살형을 집행할 때는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보통은 [[공포탄]]을 섞어서 주지만 이들은 '''모든 총알을 실탄으로 장전했다.''' 루마니아의 모든 사람들이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얼마나 깊은 분노를 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 전해지는 영상에는 사형 판결 직후 차우셰스쿠 부부를 결박하는 장면과 건물 벽을 배경으로 하여 사격이 끝나가는 때, 그리고 사형된 두 사람의 모습과 사망을 확인하고 후처리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찍혀있다. 정작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은 당시 사용 중인 비디오 카메라의 전원이 끊어지는 바람에 촬영되지 못했다. 사형 집행 당시 차우셰스쿠의 나이는 71세였고 엘레나의 나이는 73세였다. 차우셰스쿠는 재판에서 사형이 결정되자 눈물을 흘렸고 죽기 직전까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다가, 1절도 못 마치고 총살형이 집행되어 사살되었고, 이 노래는 그대로 그의 [[유언]]이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터내셔널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1절의 가사가 당시 루마니아의 상황과 완벽히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일어나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아 >'''일어나라, 굶주림의 노예들아''' >이성의 불길이 분화구에서 타오르니 >이것은 마지막 외침이 되리라 >과거는 깨끗한 판으로 덮일지니 >'''억압받은 민중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세상은 바야흐로 밑바닥부터 뒤바뀌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들이 전부가 되리라.''' 처형 장면은 군에 의해 녹화된 후 프랑스 A2-TV[* 지금의 프랑스-2TV(France 2).]를 통해 전세계 언론을 통해 지상파를 탔다. 여담으로 미국에서 처형 장면을 아침속보로, 그것도 무삭제 방영하는 바람에 이런 거에 민감한 자들에게 심대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한국 일간신문이나 KBS 9시 뉴스에도 그 영상이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691414|실렸다.(열람 주의)]][* 해당 영상은 폐쇄 아카이브인 KDAS에 저장된 마스터본 영상을 그대로 올린 터라 자막이 안 나온다.] 게다가 차우셰스쿠 본인은 죽기 직전 '''자유롭고 독립적인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조사 결과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에게는 약 120발의 총알이 박혔다고 한다. 그런데 부검 결과 차우셰스쿠는 총격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는데, [[심장마비]]가 와서 발사 직전에 이미 사망한 뒤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71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어마어마한 공포감에 그 정도 연령이었으면 충분히 일어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루마니아의 국민들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민주화]]를 쟁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차우셰스쿠의 죽음을 기뻐하는 루마니아 국민들 사이에 섞인 한 여성은 "도대체 왜 차우셰스쿠를 그렇게나 쉽게 죽인 거냐?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들을 천천히... 그리고 영원히 겪게 했어야지!'''"라고 말했으며, 육체적 고통보다는 정신적 좌절감이 심했다는 한 중년층은 차우셰스쿠의 초상화에 침을 뱉으며 "운명의 1989년 12월 25일, '''당신은 너무 편안하게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 두 발언만 봐도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이 차우셰스쿠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망명지에서 사망한 후에 한 상인은 "'''그는 그가 죽인 다른 사람들처럼 죽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게다가 이날 차우셰스쿠를 총살한 병사들 중 한 명은 "오늘 난 아버지를 죽였다"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의 법의학 연구소장인 로이르 리보는 처형 영상이 공개된 이후 총탄 자국이 난 옷 주변에 혈흔이 없는 곳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사망한지 최소 '''수 시간 뒤에 [[부관참시|또 총격을 가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죽은 뒤 수시간에 걸쳐 시신이 경직화 되면 사체에 상처가 나도 피가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확인사살]]이라는 설과 단순히 집행관들의 증오심이 그만큼 컸었다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사실 단순하게 생각해도 탄창 6개분의 총알을 거의 대부분 맞은 노인이 살아남았다고는 생각하기 매우 어려우니 후자가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 프랑스 신문에서는 익명의 루마니아 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차우셰스쿠가 처형되거나 그 직전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외국은행계좌의 비밀번호가 담긴 가방의 행방을 묻는 고문을 받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총살 장면은 그 후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부인 역시 차우셰스쿠 사망 직후 처형된 것이고 총살 장면이 촬영된 시점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겔루 보이칸 루마니아 부총리는 이 보도내용을 부인하였다.[[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1990051400181|한국경제]] 그리고 차우셰스쿠 부부에 대한 집행을 끝으로 루마니아에서 사형제는 [[1990년]] 1월 7일자로 기존에 있던 사형수들까지 [[http://www.cdep.ro/pls/legis/legis_pck.htp_act_text?idt=11033|종신형으로 감형]]받는 형태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민주화 직후 처음이자 마지막 사형집행인 셈이다. 심지어 일부 지식인들은 '''"인간이 아닌 [[악마]]를 '퇴치한' 것이므로 사형이 아닌 엑소시즘이었다. 고로 민주화 이후 사형 집행은 전혀 없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